RCPS(상환전환우선주)로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만나면, 한 번쯤은 꼭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투자를 받았는데, 재무제표를 열어보니 부채가 늘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K-IFRS 기준 재무제표를 처음 받아보신 대표님이라면 충분히 당황하실 만합니다. 분명 수십억 원이 회사 통장에 들어왔는데, 자본이 아니라 부채로 잡혀 있으니까요. RCPS가 K-IFRS에서 부채로 분류된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알고 계신 대표님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왜 부채인지, 그 논리 구조를 실무자 관점에서 풀어보려 합니다.
1. RCPS, 먼저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대응 전략을 논하기 전에, RCPS가 어떤 구조인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상환전환우선주라는 이름 자체에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상환(Redeemable): 투자자가 일정 시점 이후에 회사에 원금(또는 약정 금액)의 상환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통상 투자 후 3~5년 시점부터 행사 가능하도록 설계됩니다.
전환(Convertible): 투자자가 원하면 우선주를 보통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회사가 성장해서 보통주 가치가 올라가면, 상환받는 것보다 전환하는 쪽이 유리해집니다.
우선(Preferred): 배당과 잔여재산 분배에서 보통주보다 우선권을 갖습니다. 특히 실무에서 흔한 누적적 우선배당 조건이 붙으면, 어떤 해에 배당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 미지급 배당이 소멸되지 않고 누적됩니다. 나중에 배당 재원이 생기면 밀린 몫까지 한꺼번에 받아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정리하면, 투자자는 회사가 잘되면 보통주로 전환해서 시세차익을 노리고,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면 상환 청구로 원금을 회수하는 양방향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셈입니다.
2. K-IFRS는 왜 RCPS를 부채로 볼까?
K-IFRS(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는 금융상품을 분류할 때 법적 형식이 아니라 경제적 실질을 봅니다. 이름이 '주식'이든 '사채'든 상관없고, 핵심 판단 기준은 하나입니다.
"발행자(회사)에게 현금 등 금융자산을 인도해야 할 계약상 의무가 있는가?"
RCPS에서 상환권이 투자자에게 있다면, 투자자가 청구하는 순간 회사는 이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회사의 의사와 관계없이 현금이 나가야 하는 의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K-IFRS 입장에서 이건 빌린 돈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래서 금융부채로 분류합니다.
여기에 배당 구조까지 더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RCPS에 누적적 우선배당 조건이 붙어 있으면, 회사가 매년 이자를 지급하지는 않더라도 미지급 배당이 계속 쌓입니다. 물론 배당은 이익잉여금 범위 내에서 주주총회 결의를 거쳐야 실제로 지급되므로, 이자처럼 자동으로 나가는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환 시점이 되면 밀린 우선배당까지 포함하여 청구할 수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보면 원금에 더해 추가 부담이 누적되는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무를 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론상으로는 회사가 망하면 상환 의무도 소멸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접으려고 투자를 받는 대표는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이상, 투자자가 상환권을 행사하면 회사는 이에 응해야 합니다. K-IFRS가 이걸 부채로 보는 건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3. K-GAAP에서는 왜 자본인가?
그렇다면 같은 RCPS가 일반기업회계기준(K-GAAP)에서는 왜 자본으로 잡힐까요?
K-GAAP은 금융상품 분류에서 법적 형식을 중시합니다. 상법상 RCPS는 '주식'입니다. 주식을 발행했으니 자본금과 주식발행초과금이 증가하고, 재무제표상 자본 총계가 늘어납니다.
이 접근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K-GAAP도 나름의 논리 체계를 갖고 있고, 법적 형식을 기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방법론은 아닙니다. 다만 K-IFRS와 비교하면 실질 판단의 깊이가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비상장 중소기업의 재무보고 부담을 고려하여, 복잡한 금융상품 분류 기준을 상대적으로 간소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실무적으로 중요한 건 이 차이가 만들어내는 숫자의 격차입니다. 동일한 50억 원 투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투자 전 자본 10억 원, 부채 20억 원인 회사가 RCPS로 50억 원을 유치하면, K-GAAP에서는 자본이 60억 원으로 늘어 부채비율이 약 33%로 개선됩니다. 반면 K-IFRS에서는 부채가 70억 원으로 늘어 부채비율이 700%로 치솟습니다. 같은 투자, 같은 회사인데 회계기준에 따라 재무 건전성 지표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K-IFRS를 도입하는 시점, 특히 상장을 준비하면서 회계기준을 전환할 때 대표님들이 큰 충격을 받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4. 그러면 왜 투자자는 보통주로 투자하지 않는가
여기서 대표님들이 자연스럽게 궁금해하십니다. "처음부터 보통주로 투자하면 이런 문제가 없지 않냐"고요.
맞습니다. 보통주는 상환 의무가 없으니 어떤 회계기준에서든 자본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요즘 보통주 투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 정말 많은 자금이 들어왔지만, 그만큼 회수에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보통주로 투자하면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다른 주주와 동일한 순위에서 잔여재산을 나눠야 합니다. 원금 회수의 우선권이 없는 것입니다.
VC(벤처캐피털)는 출자자(LP)로부터 자금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구조입니다. 펀드 수익률에 대한 책임이 있고, 손실이 누적되면 후속 펀드 결성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상환권과 우선배당권이 붙은 우선주 구조를 선호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현재 업계의 표준적인 투자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결국 RCPS 구조는 투자자와 창업자 모두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투자자는 하방 리스크를 관리하고, 창업자는 그 덕분에 더 큰 규모의 자금을 유치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대가로 회계상 부채 이슈가 따라온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5. 사업을 잘하면, 부채가 진짜 자본이 된다
그렇다면 RCPS로 잡힌 부채를 자본으로 바꿀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RCPS의 '전환' 기능이 바로 그 열쇠입니다.
투자자가 전환권을 행사하면, 우선주는 보통주가 됩니다. 보통주에는 상환 의무가 없으므로 부채에서 자본으로 재분류됩니다. 회계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진짜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투자자는 언제 전환권을 행사할까요? 회사의 기업가치가 충분히 올라서, 약정된 상환금액을 돌려받는 것보다 보통주를 보유하는 편이 더 큰 이익이라고 판단될 때입니다. 전형적으로는 IPO(기업공개)를 앞둔 시점이 대표적입니다. 상장 후 주식을 시장에서 매각하면 상환금액보다 훨씬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핵심은 이겁니다. 회사가 성장하면, 투자자는 스스로 보통주 전환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재무제표의 부채가 자본으로 전환됩니다. 가장 근본적인 대응 전략은, 투자받은 자금으로 사업을 잘 키우는 것입니다.


